
Alex Karp는 팔란티어(Palantir)의 공동창업자이자 CEO입니다. 이 에세이는 그의 저서 『The Technological Republic』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대중의 반감 (The Disapproval of the Crowd)
20세기 초 벽화를 그렸던 미국 화가 토마스 하트 벤튼(Thomas Hart Benton)은, 현대미술이 대중에게 친숙한 쉬운 예술 형식을 빠르게 대체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구상주의 화풍을 고수했다. 그는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오랫동안 가르쳤으며, 그의 가장 유명한 제자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스승의 영향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얽히고설킨 우정을 이어갔다. 1944년 《Art and Architecture》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폴록은 스승에 대해 마지못해 칭찬하며 “저항이 덜한 사람과 작업하는 것보다는 그와 함께 일한 게 나았다”고 말했다. 반면 벤튼은 폴록의 작품을 ‘물감을 흘려 만든 실험’ 정도로 치부하며, 그 작품들이 장기적인 가치를 지닐 거라는 생각을 무시했다.
현대 기업들은 갈등을 너무 쉽게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기업 문화에서 ‘편안함’을 지나치게 중시하는데, 이런 동의와 친화 중심의 문화는 오히려 조직을 창의적인 성과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갈등의 작은 신호조차 서둘러 없애려는 태도는 잘못된 방향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많은 이들은 편안한 삶이 보장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고, 타인의 인정만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보상을 받게 된다. 코미디언 존 뮬레이(John Mulaney)가 말했듯, “호감 받으려 애쓰는 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과 같다.”
현실로 돌아가려는, 즉 이전에 해왔던 방식을 반복하려는, 부적절한 순간에 위험을 회피하려는, 그리고 갈등을 피하려는 일상적이고 끊임없는 압박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매우 빠져들기 쉽다. 그러나 학생들과 직원들의 주관적인 현실에 맞추려는 문화는 오히려 일부가 느끼는 불만과 고통을 더 악화시켰다. 10년 넘게 좌파 진영이 열성적으로 지지해온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과 같은 수용적 태도의 증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해로움에 대한 인식을 키우는 역효과를 낳았다. 와일 코넬 의과대학 임상 정신의학 교수 리처드 앨런 프리드먼(Richard Alan Friedman)은 2016년경부터 학생들이 “낯설고 불편한 것들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을 목격했으며, 수업 중 들은 발언에 불편함을 느꼈다는 학생들의 표현이 실제로 입은 피해에 비해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불만을 앞세운 문화(grievance industry)는 한 세대가 세상에 온전히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강인함과 균형 감각을 잃게 만들 위험이 있다. 무언가 의미 있고 차별화된 것을 만들어내려면, 타인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심리적 회복력과 무관심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술가나 창업자 모두 종종 ‘미친 사람들(mad ones)’이라 불리는데, 이는 Jack Kerouac이 『On the Road』에서 쓴 표현으로, “살기에 미치고, 말하기에 미치고, 구원받기에 미치며, 동시에 모든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물론 문제는, 가장 강렬하고 진정성 있는 비순응자들, 즉 예술가와 기존 관습을 깨는 혁신가(iconoclast)들은 동료로서 다루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창의적인 시도, 예를 들어 기술 스타트업이나 예술 운동 같은 분야에서는 인간 욕망이 백지 상태라는 점이 근본적인 도전 과제로 다가온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엇이 바람직한지 서로에게서 답을 구하며, 그 결과 타인의 의도를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받아들여 내면에 키우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1983년 한 인터뷰에서, 한 무리의 원숭이 중 한 마리가 똑같이 생긴 바나나 여러 개 중 하나를 선택할 때 생기는 갈등과 경쟁을 관찰하며 이렇게 말했다. “논쟁의 대상이 된 바나나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먼저 선택했고, 그 최초의 선택이 모방 욕망의 연쇄 반응을 일으켜 그 바나나가 다른 모든 것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창의성의 초기 단계는 모방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모방이 창의성을 해치는 독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창의적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리콘밸리에서 흔히 혁신이라 불리는 것들 대부분은 사실 이전에 성공했거나 성공한 것으로 여겨졌던 방식을 단순히 따라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모방이 때때로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모방에 그치고 발전이 더딘 경우가 많다. 최고의 투자자와 창업자들은 이 차이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과거 성공 사례를 어설프게 따라 하려는 유혹을 적극적으로 물리쳤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무(無)에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반항적 행위-빈 백지 위에 시를 쓰거나,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화면 위에 소프트웨어 코드를 작성하는 것-는 본질적으로 이전에 있던 것을 거부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반드시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냉철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창조 행위에 내재된 오만함, 즉,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모든 성과가 반드시 지금 이 순간에 그대로 답습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단호한 확신이 모든 창업자와 예술가에게 내재되어 있다.
스타트업이나 기존 강자를 뛰어넘으려는 조직에게, 현대 상업을 지배하는 무비판적 순응-즉, 대중의 반대를 감수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치명적일 수 있다. 1941년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종교적 교조주의에 맞서 개인의 약함을 비판한 『자기 신뢰(Self Reliance)』를 발표했다. 그는 “비순응하면 세상은 불쾌함으로 당신을 몰아붙인다”고 일깨운다. 에머슨은 주변 사람뿐 아니라 과거 자신의 견해에까지 순응하려는 욕구가 얼마나 우리를 제한하고 옭아맬 수 있는지 분명히 했다. 인터넷에 남은 우리의 생각과 글, 그리고 과거 발언의 일관성 문제를 집요하게 따지는 대중의 태도는 우리를 과거의 틀에 가둬버리는 족쇄가 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에머슨은 “왜 과거의 기억이라는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이곳저곳에서 했던 말을 부정하지 않으려 애쓰는가? … 요셉이 유혹자의 손에 옷을 남기고 도망쳤듯, 너도 네 이론을 내려놓고 과감히 떠나라”고 말한다. 우리도 여러 차례 그렇게 과감히 물러났다. 진전이 없다는 신호가 보이면 며칠 만에 실패한 프로젝트를 접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팀을 해체했다. 물론 때로는 너무 신중한 나머지, 이미 투자한 사람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판단을 쉽게 바꾸지 못한 적도 있다. 하지만 대중과 투자자들은 방향 전환이나 계획 수정, 실수에 대해 너무 가혹하다. 의미 있는 성과는 결코 일직선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맞춰 자신의 사고방식을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집요한 실용주의(voracious pragmatism)’와, 증거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용기다. 증거를 억지로 내 생각에 끼워 맞추지 말고, 내 생각을 증거에 맞게 바꿔야 한다.
원문: The Disapproval of the Crowd by Alex Ka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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